신영희 명창 사위 나이 딸 전남편 인분
3일 TV 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에는 1980년대 '유머 1번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쓰리랑부부'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은 명창 신영희 편으로 꾸며졌는데요. 오늘은 신영희 명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영희 명창은 목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목포로 이사온지 3년만에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생계를 책임지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신영희씨의 나이가 16세 였다고 하는데요. 당시 오빠는 고등학생,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이라 신영희 명창 밖에 돈 벌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명창 신영희씨는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제 보유자 이신데요. 신영희씨는 국안인이였던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아 11살 때부터 소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신영희씨는 "14살 때 목이 탁해서 말도 안 나왔다. 온몸이 아팠다. 속이 아픈게 아니라 살이 아팠다. 어혈에 좋다길래 인분을 먹었다" 며 소리를 위해 인분을 먹었다고 고백했죠. 신영희씨는 "내 것 헝겊에 싸서 물에 담가두면 아침에 정종 색으로 변한다. 그걸 많이 먹었다" 라고 털어놨죠. 그녀는 무려 6개월간 인분을 섭취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1년쯤 지나니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고 하죠.
신영희씨는 '인생다큐 마이웨이' 방송에서 전 남편과의 이혼을 언급했는데요. 전남편에 대해 "젊은 여자를 만나려니 돈이 필요했겠죠. 제가 이혼 하고 싶어 했던게 아니고 (전남편이) 딴짓하고 다니니까 못 살죠. 전남편이 3억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는데 꼼짝없이 당할 판이였는데 3억이 아닌 5300만원 주고 마무리했다" 라며 이혼 사유와 과정을 밝혔습니다.
신영희씨는 가족으로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한 명 있는데요. 딸이 어렸을때부터 바쁜 스케줄로 잘 못챙겨준게 늘 미안하여 그 미안함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신영희씨는 두번의 이혼을 하였는데요. 첫남편은 가부장적인 성격 탓에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신영희 명창을 이해하지 못해 헤어졌고, 이후 만난 두번째 남편은 바람을 피워 재혼 14년 만에 다시 이혼을 선택하게 되셨죠.
신영희씨는 딸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실내화 한번 세탁해준 적이 없고 도시락과 준비물도 챙겨준 적이 없었다며 딸에게 잘 못해준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미안할 것 같다고 고백했죠. 국악인 신영희씨 사위가 연관검색어에 올라오고 있지만 사위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신영희 명창은 국악을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국악인인데요. 대중음악과 달리 전통음악인 국악을 알리기가 쉽지 않아 신영희 명창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였다고 합니다. 국악계에서는 물론 반대가 심했으며 당시 그녀의 스승 조차도 그녀를 외면했었다고 하죠.
그러나 신영희 명창은 국악의 대중화 방법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당시 욕을 많이 먹었지만 지금까지 후회한 적이 없이 잘했다고 생각하신다고 하네요. 또한 신영희 명창의 제자들도 선구자 이신 신영희씨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많이 전한다고 하죠. 신영희씨는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 코너에 무려 4년 동안 출연한 바 있습니다.
현재 명창 신영희씨는 68년차 국악인이시며 후배 양성과 본인 실력을 쌓는데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계십니다.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전' 보유자이신 신영희 명창은 1942년생으로 78세 이시며 고향은 전라남도 진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악이라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엄청난 결정을 하셨던 선구자 신영희 명창. 신영희 명창의 중대한 결정을 통해 정말 국악이 더욱 더 대중들에게 알려졌던 계기가 된 것 같은데요.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신영희 명창의 후배 양성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